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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생각하기

종교를 믿는다는 것과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

by 主同在我 2009. 5. 27.

참 쉽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신앙인으로서 이와 같은 질문을 마주 대할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착잡해짐을 느끼게 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별안간 접하고서 그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착잡함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인지 모른다. 물론 아직 이 땅에 19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땅에는 35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같은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가만이 생각해보면 신앙을 가진다는 것만큼,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종교를 가진다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어떤 이는 무교, 혹은 무종교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렇게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무종교인…. 과연 무종교인이란 존재할까? 나의 대답은 이다.

 

종교라는 것은 어찌 보면 신념체계와도 같은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해서 별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한번 깊이 숙고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신념체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이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만일 그 이상을 뛰어넘는다고 한다면 그는 성자의 칭호를 받았을 것이며, 그 이하라고 한다면 열심을 가지고서도 사이비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멀리할 수 없다.

 

종교가 어찌 신념체계에 불과한가? 그것은 쉽게 증명된다. 오늘 정치를 생각해본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곳에 확장시켜 나가자는 데에는 크게 동의하지만,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만큼은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그 생각들이 다양하며, 더군다나 그것이 정치적인 현안과 민감하게 대립하고 있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물리게 된다면 정확하게 이반의 길을 걷고 마는 것이 현실임을 감안해본다면 우리는 쉽게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종교가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주장하신다. 그것에 반대할 기독교인들은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역사가 역사의 진보를 꾸준히 원하고 있으며, 그 원하심이 기득권자들의 권력과 이권을 하층민들과 또한 그 반대파들과 충분히나누라 한다면 여러가지 반발이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많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역사의 진보를 주장하시고 이끌어가시고 독려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이 역사의 진보 앞에 우리 역시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나누자고 한다면 그 설교자는 그 순간으로 빨갱이혹은 좌파로 몰려 교회를 옮겨야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반대로 사회변혁을 꿈꾸는 열망으로 가득찬 이들이 모여있는 교회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설교자의 미래 역시 밝지만은 못하다.

 

단적인 예를 더욱 들어보자.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정말 진리가 내 안에 가득차기를 원하고 있는가? 열망하는가? 정말 이 땅이 그렇게 변하기를 바라는가? 혹시 10년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자신이 죽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왜 나의 습관은 변하지 않는가? 왜 매주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자신의 모습과 습관과 반응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가? 왜 당신은 또 똑 같은 선택을 하고 또 똑 같은 참회를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무의미하게 반복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진정 진리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신념, 다시 말해, 당신이 지금 마음 속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우상화시켜 믿고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이 역사의 갈 길이 가진자로 더 가지게 해주는 나라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나라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의 반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는지…..

 

정치하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힘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모두가 교회에서 예배는 드리고 있으며 기도는 드리며, 목사와 함께 악수는 하지만 그 마음 속을 이끌고 있는 한 가지는 원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는 자아의 욕구, 신념의 체계일 뿐 진리 그 자체를 따르고자 함에서 나온 종교란 이미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는지 모른다. 부자종교성의 부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그리 적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렇다면 열심있는 많은 이른 바,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있는 것인가, 허상에 젖어있을 뿐인가!

 

나 자신만 보아도 그렇다. 종교성에 젖어 있는 것이지, 말 그대로 종교…. 가르침의 근본…. 진리를 따라 내 삶을 살려하는 의지는 너무나 박약하다. 매번 선택의 순간마다 손을 들어주는 것은 내 자신의 신념, 내 자신의 고집, 그동안의 습관과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과연 진리의 소리가 아주 작게 혹은 아주 크게 내게 들려올 때 그 소리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발을 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니 인생에 있어 몇 번이나 그리 할 수 있을까?

 

처절한 자기인식의 사건이 먼저 필요하다. 나 자신이 진리를 따르는 체 하는 것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야 마는 가슴아픈 부끄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선행되어야 한다. 그 직함이 목사가 되었건 선교사가 되었건 아니면 권사, 장로, 집사가 되었건 아니든간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종교행태를 발견하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신념체계 안에서 종교와 진리를 논하고 있을 뿐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아니오로 일관한 선문답 속에서 오히려 큰 도전을 얻는다.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나의 이 열심이라는 것이, 나의 이 기도습관이라는 것이, 나의 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과연 정말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과 생각을 충족시키려는 갈망인가? 끊임없이 묻고, 그 모든 욕망들을 하나씩 거부해 봄으로써 그것이 진정 진리를 향한 것인지, 신념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를 가려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초라함을 보아야 한다. 얼마나 덧없는 신앙이었는지, 얼마나 덧없는 열심이었는지, 얼마나 덧없는 자기고집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매일 매일을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 묻고 시험하면서 진리의 길을 따라 걸어갈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과연 자기의 욕심과 싸울 자가 있겠는가? 과연 자기의 이상과 꿈과 도전할 자가 있겠느냐 말이다…… 과연 자기에게 익숙한 반응들과 사고들에 대항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이를 악물 자가 있겠느냐 말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경험할 때, 배우자에게도 말을 하지 못해 쥐구멍에라도 피해 있고 싶어지는 그 순간을 경험할 때 비로소 종교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말할 수 없는 갈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끈임없이 진리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열망, 계속해서 나 자신과 싸우고 또 싸우고자 하는 힘과 에너지가 창자 속에서부터 올라올 때마다 바울의 말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피 나는 전투를 다해가고자 한다면 그제서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고 동의하게 되리라.

 

과연 진리를 따르는 자가 있을까….. 크고 작음이 아니다. 대단하고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진리 때문에 내 습관, 내 생각, 내 성향, 내 익숙한 모든 것들과 싸울 수 있다고 한다면, 남이야 그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지간에 그는 정말 부럽게도 이미 진리의 길, 종교의 길,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는 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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