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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생각하기

고양이로 인해 발견한 주님

by 主同在我 2009. 2. 2.
1999년 7월 13일 고양이 엄마 지 형 습
 
고양이 한 마리가 엘림 세미나실로 들어왔다.
평소에 좋아하던 터라 잘되었다 싶어 빈 박스 하나로 집을 마련해 주었지. 그 고양이도 나에게 신뢰를 느꼈는지 박스 안에서 살림을 차렸다. 새끼를 밴 것이다.
어느 주일 밤, 교회에서 퇴근하여 세니나실에 들려보니 벌써 새끼를 낳은 후였다.
한 마리. 배를 만졌었을 때는 분명 여러마리였는데, 왜 한 마리 뿐이었을까?
요리조리 살펴본 후에 한 마리는 납작하게 깔려,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있는 것을 찾아냈다. 엄마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새끼의 울음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였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의 생존고양이의 움직임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정성스럽게 먹이를 공급해 준다.
평소 같으면, 혼자서 잘 먹고 살았을 고양이이지만, 새끼를 두고서 떠돌아 다니면, 새끼는 누가 보살피며 젖은 누가 주겠는가?
하는 수 없이 ‘응아’할 때를 빼곤 가만히 새끼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내가 먹이를 공급해 준다.
아뿔싸! 고양이가 없어졌다.
집을 들여다보니 새끼만 덩그라니 혼자 남아 엄마를 찾고 있다.
다급해진 마음에 셔츠를 덧입고 기숙사 문밖을 나가 고양이를 찾아 헤맨다.
고양이 이름을 몇 번 되풀이하여 불렀을까.....
저 멀리서 작은 검은 물체 하나가 쏜살같이 나를 향하여 달려온다. ‘나비’였다.
“나비야, 어디 갔었어? 너 새끼 혼자서 얼마나 울고 있는지 아니? 새끼만 두고 나갔다 오면 어떻게 해? 먹을 것은 내가 갔다 주지 않니?”
볼멘 소리로 한 바탕 야단을 쳤지만, 고양이는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아무튼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양이는 얼른 자기 새끼에게로 발길을 향한다.
아직 새끼는 살아있었다. 다행이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 고등어 반찬이 나왔다.
‘나비’가 생각나 빵 봉지에 고등어를 잔뜩 담아 세미나실을 향하였다.
‘나비’는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먹는동안 고양이 집 안을 살폈다.
새끼가 궁금했걸랑.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새끼가 보이질 않았다.
당황한 나의 마음은 새끼의 위치를 포착해 냈다.
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삽 밑에 고개를 처박고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엄마를 불렀는지 입을 크게 벌린채로..... 끔찍했다.
어이가 없어, 나는 ‘나비’에게로 가 ‘나비’를 내려다 본다.
“나비야, 이 바보같은 녀석아. 결국 새끼를 죽이고 말았구나.
새끼를 보호하지 않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니? 결국 네가 낳은 새끼 두 마리를 다 죽이고 말았어...”
정신없는 고양이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서 고등어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고양이가 머물고 있던 박스와 그 안에 있던 헌 잠바 하나를 쓰레기 통에 집어 넣고서, 마지막으로 이미 생명이 떠나 버린 새끼 한 마리를 봉지에 싸서 처리했다.
휴지통 근처에서 식사하고 있던 ‘나비’녀석은 배가 차자, 집으로 돌아 오던중, 이상한 냄새를 캐치했다.
자신이 해산하면서 흘렸던 피 냄새, 그리고 자신의 분신이 흘려놓았던 분비물의 냄새였다.
버려진 박스 안으로 들어가 빙빙 돌면서 나를 바라본다.
‘야-옹’울면서 나를 바라본다.
새끼를 찾는 것이었다.
자신의 관리소홀로 인하여 이미 죽어버린 새끼를 찾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면, 힘껏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안타깝다.
‘이 바보같은 고양이야, 아이를 처음 낳아보니?
아이가 너의 배 밑에 깔려 죽는 것도 모르고서 잠을 잤단 말이냐?
너의 아이가 대문 밖 삽자루 밑에 처박혀서 엄마를 찾을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니? 이 바보같은 고양이야? 네가 그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느냐?’
고양이의 집을 세미나실에서 철수시켰다.
더 이상 고양이가 세미나실에서 살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아니, 고양이를 세미나실에 보호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제 고야이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줄 이유도 없었다.
고양이를 집어들고는 창살이 나 있는 기숙사 후문을 향하였다.
눈치를 챘는지,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그 눈빛이 한 없이 처량해, 그리고 한심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며칠간 고양이를 통하여 나에게 큰 깨달음과 채찍을 주셨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를 돌보지 않고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목회자들의 잘못을,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 주신 것이다.
먼저 나에게이다.
나는 어떠하였는가?
이제 성경학교를 며칠 남기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선생님들에게는 깨어 기도하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은 악한 사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기도하라고 지적하였던 나의 손은 지난 밤 무엇하고 있었는가?
정욕에 사로잡히어 거짓된 사랑에 헤매이고 있지 않았는가?
이러한 형편없는 나의 모습에 또 하나의 새끼는 울부짖으며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주님께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여주신 이상, 나의 방황을 계속할 수는 없다.
나의 마음이 주님의 사역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내가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듯이 말이다.
주인의 원하는 것은, 내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잘 관리하는 일이 아닌가?
마음이 떠나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양육하는 것이 아닌가?
젖을 주는 것이 아닌가?
깔릴 것 같은 때는 입으로 물어 안전한 곳으로, 편안한 곳으로 그들에게서 짐을 벗기워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무엇하고 있는가?
새끼가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혹시 나중에, 아직 살아있으려니 하고 집을 찾아보니 훵하게 비어있는 집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장담할 수 없다.
주께서 아직 새끼를 죽이지 않으시고 나에게 경고사격을 하신 것이라면, 나는 그 경고사격을 달게 맞겠다.
배가 고프더라도 참을 것이다.
놀러 나가고 싶어도 참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기워진 새끼들, 생명들이다.
이것들을 보호해야 한다.
먹여야 한다.
품에 안아주어야 한다.
그것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지 않도록....
주님, 저의 악함을 용서하소서. 주의 은총을 베푸소서.
주님의 때가 차기 전에 돌이키게 하소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면 용서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사 돌이키소서.
제가 주께 나아가나이다.
이제 깨달았나이다.
주님의 교회를 죽이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나이다.
새끼가 죽어버린 후에 울부짖는 바보같은 고양이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총을 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