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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이야기

9월 이야기

by 主同在我 2010. 10. 2.

한 걸음, 한 걸음, 오늘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에 먼저 감사 드립니다. 사실, 저희가 올릴 말씀이 이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작년 10월 즈음부터 기다려왔던 본 사역지로의 이동이 근 1년 가까이 늦어지게 될 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를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늘 시간에 쫒겨 살면서, 모든 일들이 효율적으로만 진행되기를 갈구해왔던 저로서는 지난 시간들이 저희 가족의 남은 인생을 허비하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되었었지만, 이 곳 빨로뽀에(Palopo) 도착하고 보니 집 없는 유랑생활을 한 지난 6개월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귀한 훈련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 사역지로 들어가기 며칠 전, 자카르타에 계시는 선배님들께서 사랑과 격려와 축복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근 땅그랑에서, 그리고 반둥에서, 또한 타교단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셔서 사랑을 나눠주신 김 목사님 가정도, 아울러 자카르타 거주 선배님들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지난 8월 하순, 노동허가권이(IMTA) 발급되고 나서 저희 가족은 8월 22일 그동안 머물고 있던 자카르타를 떠나 26일에야 비로소 빨로뽀에 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도착해서 주소 이전절차 (MUTASI)를 비롯해서 새 정착지에서 진행해야 할 행정절차들을 진행시키는데 약 2주 가량 소요되었고, 새로운 집과 환경 가운데 살림살이를 하나씩 마련하고 이사 짐을 정리하는 데에만 9월 한 달이 소요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새삼 느끼게 되었던 것은 저희보다 앞서 갔던 선배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는지요. 이렇게도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상심하게 만드는 모든 과정들을 의연하게 넘어서서 맡기워진 사역들을 감당해내고 있으니 저희로서는 정말이지 우러러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정착하게 된 이 곳 빨로뽀는 인구 13만 7천여명의 소도시로서, 비록 도청인 마카사르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근에서는 교통, 교육 중심 도시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큰 흥미를 끌만한 것은 없기 때문인지 이 곳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아직 듣지도 만나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다만, 이 곳에 도착해서 저희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된 것 중 하나는 종교간의 벽이 자와 섬보다 더욱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와 섬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직업을 찾기 위해서라도 종교간의 공생과 공존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는듯한 분위기이지만, 이 곳 술라웨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서는 아예 술라웨시 이외의 지역, 예를 들면 기독교 지역인 파푸아 같은 곳으로 가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소수인 기독교인의 존재 자체는 합법적으로 인정되고는 있으나,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갈등과 불신의 골이 아직 깊이 남아 있으며,이러한 골은 때때로 종교간의 다툼이나 일방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기독교 교회 사이에서도 깊은 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슬람으로부터 핍박이 있고 폭력이 행해진다고 한다면 교회끼리 연합운동이 일어날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 제 눈에 비치어지는 이 곳 교회들의 모습은 기존 교회인 토라자 교회와 신생교회들 간의 불신의 마음이 신자들의 마음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갈라져 나간 무리로 혹은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무리로만 인식하고 있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운 에너지가 더욱 그 힘을 잃은 채로 기독교인과 교회라는 그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곳 빨로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들의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은지는 사실 아직 모르겠습니다. 할부를 해서라도 오토바이를 구입하고, 그 오토바이로 오젝(오토바이 택시)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 역시 가슴이 답답해 집니다. 변변한 산업기반도 가공공장도 시설도 유치되지 않은 까닭에, 길거리마다 남자들이 각자의 오토바이를 끌고 나와 손님이 불러주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뭐라고 해야 할지요. 인구 10여만명에 비해 공급과잉된 오토바이 택시들은 이 도시의 에너지를 건전하게 발전시켜 나갈 반듯한 방안이 아직 없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실업 인구는 많은데, 가게들은 저마다 물건을 마카사르에서부터 떼어온다는 이유로 2-3배 비싸게 판매하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직까지 저희로 이 곳 빨로뽀의 경제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저희는 하나님께서 이 곳에서 어떤 사역을 어떻게 펼쳐 나가기를 원하시는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관계로, 그저 저희에게 맡기워진 일, 즉, 현지 협력교단에서 요청하는 일들을 일단 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대략, 성경 중, 고등학교 사역, 교단 교회 협력 사역이 될 것 같은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 하나 하나 힘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가족 근황이 빠졌군요. 동재는 이 곳에 있는 현지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여 아직까지는 잘 다니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 인도네시아 말을 잘 할수도 읽을수도 없는 상태이지만,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으니 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진이는 현재 아내와 씨름 중입니다. 그야말로 집에 혼자 남아서 살림과 더불어 동진이와 맞상대를 해야 하다보니 아내가 힘들어 하네요. 동재와는 또 다른 성격과 습관을 가진 동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저희 두 사람은 고민 중입니다. 집을 구한 곳이 마을 한 가운데 이다보니 동재, 동진이는 마냥 집을 나가서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고, 저희는 아이들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무력한 부모로 이웃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은혜와 지혜가 필요한 일이네요.

이 곳에 처음 들어와서는 많이 다른 환경으로 인해서 불평도 불신도 많았었는데, 이제 점점 무디어져 가는 것인지 아니면, 적응을 해 가고 있는 것인지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입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지는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사역으로는 이제 막 첫 발을 내 딛으려고 하고 있는 저희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여러분의 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격려해주시고 기도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계속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저희가 이 곳에 정착하는 데 있어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는데, 그러한 비용들을 마련하는데 기꺼이 동참해 주신 동교동교회를 비롯한 귀한 협력교회들과 또한, 여러 사정으로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개인 후원자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있었기에 저희가 오늘까지 견딜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주님 안에서 사랑의 빚을 집니다. 계속하여 이 걸음을 주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2010년 9월 29일

인도네시아에서 지형습, 정선영, 동재, 동진 올림


<빨로뽀로 들어가기 전, 이민국 들르는 일로 빠레빠레에서 하루 밤 묵었는데 그 곳에서 한컷!!>

<뒷 집에서 돼지 잡는다고 해서 구경나온 촌 사람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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